며칠째 문 한 번 두드려 보지 못하고 서성대던 수덕 도령은 용기를 냈다. 남자 대장부로서 애간장만 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은 떨렸고 안정이 되질 않았다.
“실례지만 안에 계시오니까?”
안에서 가냘픈 여인의 소리가 문틈을 비집고 살그머니 새어 나왔다. 분명 덕숭 낭자의 목소리였다.
“뉘신지요? 이 야심한 밤에!”
수덕 도령은 할 말을 잊어버렸다. 주저 주저하고 있는데 다시 한 번 안으로부터 소리가 있었다. 문은 열리지 않은 채였다.
“이 야심한 밤에 뉘신지요?”
‘야심한 밤’이라는 말이 이상하게도 수덕도령에게는 비수처럼 날카롭게 날아와 꽂혔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저…..저, 소생은 이웃 마을에 사는 수덕이라 합니다. 야심한 밤에 실례인 줄 압니다만, 저…..꼭 만나 뵙고 싶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문이 비스듬히 열리면서 덕숭 낭자가 외씨 같은 버선발을 살짝 드러냈다. 수덕 도령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짓누르고 서 있었다. 마침 초가을 달이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와 두 사람의 행동을 엿보고 있었다. 덕숭 낭자가 말했다.
“소녀는 혼자 사는 사람입니다. 하여 도령을 맞이할 수 없음을 용서하소서.”
수덕 도령은 생각보다 마음이 급했다.
“낭자, 낭자와 혼인하고 싶습니다. 저의 구혼을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초면에 구혼이라! 너무 빠르다고 생가지 않으십니까? 더욱이 지체 높으신 도련님께서 이 미천한 소녀를 선택하심에 일말의 여유도 주지 않으시고요.”
수덕 도령은 아차 싶었으나 이왕 엎지른 물이 되어 버렸다. 성급한 말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나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혀 여유를 갖고 생각해 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튀어나온 말을 달랐다.
“만약 낭자께서 저의 구혼을 거절하신다면 나는 죽음으로써 내 뜻을 표할 것이오다.”
“소녀, 도련님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오나 아직 나이가 어리옵니다. 또한 도련님과 신분도 어울리지 않고요. 그러니 좀더 여유를 주시면 생각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낭자, 덕숭 낭자. 나는 그대를 한 번 본 뒤로는 손에서 책을 놓아 버렸습니다. 벌써 두 달이나 됩니다.”
덕숭 낭자가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나를 보셨다고요?”
“전에 사냥하러 산에 갔다가 거기서 처음으로 낭자를 보았습니다.”
수덕 도령은 그날의 상황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모든 전개과정을 낱낱이 얘기했다. 덕숭 낭자도 다소곳이 들었다. 덕숭 낭자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만 들어 주신다면 소녀는 도련님과 혼인을 약속하겠습니다.”
“그 조건이 무엇인지요?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내 그대를 나의 아내로 맞는 일이라면 어떠한 일이라도 하오리다.”
“저의 부모님은 뜻하지 않은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영혼을 위로해 드리고 싶습니다. 저를 위해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 주셨으면 합니다.”
“좋습니다. 집 근처라면 어디쯤이 좋겠습니까?”
“처음에 저를 보셨다는 그곳에 지으심이 적당할 줄 아옵니다만??.”
이렇게 해서 절을 짓는 일이 시작되었다.집안의 어른들도 반대했고 부모님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동네에서는 수군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덕 도령은 개의치 않았다. 예산 읍내는 물론 인근지역에도 수덕 도령의 집안은 갑부로 알려져 있었고 지체도 높았다. 수덕 도령은 많은 사람들을 사서 기둥을 다듬고 서까래와 대들보를 준비하였다. 기와를 굽고 주춧돌을 갖추었다. 그리고 한 달 만에 절이 완공되었다. 참으로 빨리 지은 것이었다. 절이 완공되자 수덕 도령은 덕숭 낭자에게 한달음에 달려갔다.
“덕숭 낭자, 절이 완공되었습니다. 단청까지 막 끝내고 오는 길입니다. 한 번 같이 가서 보시지요.”
덕숭 낭자는 반가워하는 기색도 없이 덤덤히 말했다.
“너무 쉽게 지으셨군요. 하지만 저걸 보십시오.”
수덕 도령은 덕숭 낭자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방금 단청을 끝내고 온 절이었다. 절에 불이나 삽시간에 잿더미로 화하고 말았다. 수덕 도령은 부처님을 원망하면서 울음을 삼켰다. 덕숭 낭자가 위로하면서 말했다.
“도련님, 절을 지으시려면 한 여인을 탐하는 마음을 초월하여 오로지 일념으로 몰입해야 합니다. 부처님만을 생각하시고 다시 지으십시오.”
수덕 도령은 새로운 각오를 했다. 그는 다시 절을 짓기 시작했다.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며 일을 했다.그러나 순간순간 일어나는 덕숭 낭자에 대한 그리운 정을 어쩔 수 없었다. 한 달이 지나 절은 마침내 완성단계에 접어들었다. 이제 단청을 할 차례였다. 그때 뜻하지 않은 불이 스스로 일어나 지금까지 지어 온 대웅전을 또 홀랑 태워 버리고 말았다.
수덕 도령은 정성이 부족해서라 생각했다. 부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가끔씩 일어나는 덕숭 낭자에 대한 그리움의 정 때문에 화재가 난 것으로 알았다. 수덕 도령은 화재가 난 그날 다시 건축불사에 들어갔다. 그는 몇 번이고 완전해질 때까지 정성을 들여 다시 짓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아홉 번 화재가 나면 열 번이라도 다시 짓겠다는 그의 굳센 결의는 어느 누구도 말릴 수가 없었다. 또 한달이 지나자 이루 말할 수 없이 신비롭고 장엄한 대웅전이 형체를 드러냈다. 수덕 도령은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그 감격은 덕숭 낭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그토록 아름답고 장엄하며 예술적으로도 뛰어나게 지은 데 대한 자부심이었다. 수덕은 흡족한 마음으로 합장했다.
“오! 부처님이시여. 이제 당신의 집은 완성되었나이다. 이제 이 대웅전에서 당신의 위대한 가르침이 영원히, 영원히 이어지게 되었나이다. 아! 장엄하옵니다.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이 대웅전은 오로지 당신의 가호로 이]룩된 것이옵니다. 이토록 아름답고 예술적인 대웅전은 전에도 없었고 현재도 없으며, 앞으로도 이 지상에 다시 없을 것이옵니다. 부처님, 저의 소원도 이제야 이루어지게 되었나이다. 부처님…”
곁에서 보고 있던 덕숭 낭자도 합장한 채 기도를 올렸다.
“부처님, 이제 수덕 도련님의 원력으로 소녀의 소원이 이루어졌사옵니다. 앞으로 소녀는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 수덕 도련님을 모시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저희들을 증명하여 주시옵소서…”
수덕 도령과 덕숭 낭자는 가족과 일가친척들의 축복 속에서 혼인의 예를 갖추었다. 새로 지은 대웅전에서 올리는 예식 또한 간소하면서도 장엄스러웠다. 예식을 마치고 내려와 신방을 꾸몄다.
촛불이 아스라히 실내를 비치고 있었다. 분위기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다. 수덕 도령이 덕숭 낭자의 옷을 풀려 하자 덕숭 낭자가 약간 뒤로 물러나 않으며 조용히, 그리고 냉정하게 말했다.
“부부간이지만 잠자리는 따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수덕은 느닷없는 덕숭 낭자의 행동과 말에 주춤했다. 그가 말했다.
“부부가 된 이상 같은 방, 같은 잠자리를 쓰는 것은 옛부터 내려오는 인륜의 기본입니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 혼인도 하는 것이고요.”
수덕 도령은 덕숭 낭자의 대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는 듯 말을 마치자마자 덕숭 낭자의 손을 덥썩 잡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뇌성벽력이 천지를 뒤흔들 듯했다. 순간적으로 놀라며 뒤로 물러선 수덕 도령은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덕숭 낭자, 즉 신부가 사라진 것이다. 대신 그의 손에는 신부의 버선 한 켤레가 쥐어져 있었다. 그가 버선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신방 안에 웬 난데없는 커다란 바위가 나타났고 그 바위 틈새에서 마치 신부의 버선과 꼭 닮은 하얀 꽃이 돋아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신방도 없어졌고 보이는 것은 바위와 버선처럼 생긴 하얀 꽃, 그리고 울창한 숲이었다. 수덕 도령은 깨달았다. 애욕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덧없는 것인가를. 사랑의 힘이 얼마나 숭고하고 경외스러운 것인가를. 그는 덕숭 낭자를 사모하는 마음 하나로 절을 세 번이나 지었다. 바로 그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증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애욕으로 변할 경우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또한 실제로 증명한 셈이었다. 그 후 수덕은 절 이름을 ‘수덕사’라 부르고 수덕사가 있는 산이름을 덕숭 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덕숭 낭자는 다름아닌 관세음보살의 화현이라고 전해졌다. 지금도 수덕사 부근 바위 틈에서는 이른바 ‘버선꽃’이 해마다 피고 있는데 이를 ‘관음의 버선꽃’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