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서력 1392~1398재위)는 나라를 세운 후에 국호를 제정코자 하였다. 그는 두 가지의 국호를 생각했다. 하나는 예로부터 한민족이 고조선의 자손임을 나타내는 조선(朝鮮)이라는 국호였고, 다른 하나는 태조의 고향이 함흥 강령 땅이었으므로 그 고장의 이름을 각기 한자씩 따서 함령이라 지은 것이었다. 조선이라 할 것인가 함령으로 할 것인가를 태조와 그 조정에 속한 권한이 아니었다. 그 권한은 중국에 있었다.
우리나라는 고려 중엽 이후 중국의 속국으로 청해 있었다. 아니, 고려 중엽이 아니라 삼국시대가 거의 끝나갈 무렵부터 항상 중국의 재가를 받아 모든 국사를 처리해 왔으니, 우리 민족은 훨씬 오래전부터 비운 속에 살아왔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성계는 공민왕의 신하로 북벌에 공이 큰 장군이었다. 그는 고려 조정이 흔들리는 틈을 이용하여 창칼을 조정으로 돌렸고 자기 휘하에 있던 군대를 일으켜 쿠데타를 성공하였다.
그는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그 뒤를 이어 우왕(서력 1374~1388제위)와 창왕(서력 1388~1389 재위) 그리고 공양왕(서력 1389~1392 재위) 등을 차례로 왕위에 올려 놓았다가는 폐위시켰다. 이른바 과도기적 정부에 있어서 이들 왕은 허수아비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었다.다시 말해, 이성계의 치밀한 계획하에 놀아난 꼭두각시 왕들이었다.
공양왕이 세상을 떠나자 이성계는 스스로 보위에 올랐다. 그는 그러나 한 가지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었다.고려의 멸망을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보던 수많은 기득권층들은 죽음으로써 이성계에게 항거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고려의 멸망이 안타까워서라기보다는 그네들이 지금까지 누려 왔던 부귀영화를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기득권의 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성계는 ´새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논리를 적극적으로 전개, 새로운 정치이념과 정치질서를 주창했다. 당시 중국은 주원장이 명의 황제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주원장은 원나라 조정을 폐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명나라를 세운 인물이었다. 그는 명의 태조였다. 명의 태조 또한 군 출신으로 막강한 군사력과 뛰어난 통솔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주원장의 정치스타일은 상명하달의 철저한 군인정신에 의해 이루어졌고 뜻을 거스르는 자는 가차없이 참수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국호를 두 가지로 압축하기는 했지만 이를 그냥 쓸 수 없었다. 중국 명제의 재가를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원장은 자신도 쿠데타로 명을 세웠으면서 자신의 처지는 한 치도 생각지 않고 이성계가 역신배장이라하여 그 의견을 무조건 무시하고 깍아 내렸다.
태조 이성계는 개국공신들을 불러 놓고 말했다.
"짐이 경들을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국호에 관한 질문 때문이오. 조선으로 하느냐 함령으로 하느냐에 대해 명 황제의 재가를 받아와야 하는데 경들 중 누가 앞장 서서 이 일을 해주겠소?"
신하들은 어느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태조가 다시 말했다.
"경들은 귀가 먹은 거요? 짐이 하고 있는 말이 들리지 않소?"
"황공하여이다, 전하!"
대신들은 한결같이 황공하다는 말만을 되풀이했다. 태조가 언성을 높였다.
"그러고도 경들이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소? 충신이란 나라가 곤경에 처했을 때 앞장서서 그 자신을 불사르는 사람이오. 태평성대의 충신 노릇이야 누군들 못하겠소?"
그때 정승 조공이 입을 열었다. 그것은 그가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전하, 소신이 다녀오겠습니다. 하오니 노여움을 거두시옵소서."
태조는 조 정승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시오, 조 정승! 지금까지 국호의 재가 문제 때문에 명나라에 간 사신이 한 두 사람이 아니오. 그들은 모두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소. 명제의 칼날아래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오. 경은 그 사실을 알고 있소?"
"황공하여이다. 전하. 신 이미 알고 있사옵고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태조가 약간 누그러진 어조로, 그러나 힘이 담긴 어조로 물었다.
"살아서 돌아올 기약이 없는데도 경은 자진해서 갈 수 있겠소? 만약 자신이 없다면 짐이 어명으로 다른 사람을 보내겠소. 사실, 짐은 조정승과 같은 인물을 잃고 싶지가 않소."
"전하, 신이 비록 미약하오나 국사를 위해 이 몸을 바치겠나이다. 다른 사람을 보내실 양이면 신이 가겠사오니 윤허하여 주옵소서."
그제서야 다른 신하들도 본래의 안색을 되찾았다. 그런 상황을 바라보는 태조는 정치 현실의 냉정함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꼈다. 평소에 임금인 자기를 위해 어떠한 일도 다 감내해낼 듯이 아부하고 충성하는 듯하더니 막상 죽음의 길을 눈앞에 두고는 서로 발뺌하는 신하들이 도무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는 자신이 왜 정치에 뛰어들어 임금이 되었는지, 스스로가 밉고 저주스럽기까지 했다.
"좋소. 그럼, 경이 짐을 위하고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이일을 반드시 성취시켜 주시오."
그렇게 해서 조 정승은 명나라로 가는 길이었고, 황해도 서흥 땅에 이르러 하룻밤을 유숙하다가 사미들을 만나 이 절터에 까지 오게 된 것이다.
조 정승은 산에서 내려오는 즉시 황해 감사를 불러 그 절터에 새롭게 대가람을 세우고 세 분의 돌부처님을 모시도록 명을 내렸다. 황해 감사는 정승의 명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절을 짓는 일이 시작되었다. 터를 다시 닦고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얹었다. 서까래를 걸치고 기와를 얹었다. 황해 감사가 직접 나서서 감독하였으므로 불사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