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새벽 예불을 끝내고 청문대사가 시킨 대로 일주문밖에 나간 선우화상은 가슴이 철렁하고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뭔가 늘씬하게 생긴 동물이 일주문 기둥에 옆구리를 대고 누워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다시 그곳을 살펴보니 사람이 누워 있었다.
이미 히끄무레하게 아침이 열리고 있었다.
´참 이상도 하지! 아까는 분명 무슨 동물 같았는데…´
하얀 바지 저고리에 수건을 머리에 질근 동여맨 남자 곁으로 가면서 그는 중얼거렸다.
"내 절에 들어와 부처님을 시봉한 지 어언 스무해건만 사람을 보고 동물로 착각하여 기절을 하다니, 아직 공부가 덜 익은 게 분명해. 생사를 초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님은 6년 고행 끝에 나고 죽음을 해결하셨다는데 나는 그 세 배가 넘는 20여 년을 수행하고도 이 지경이니, 쯧쯧."
선우화상이 가까이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사내가 눈을 떴다. 선우화상이 쭈뼛거리며 수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소승은 내소사 주지로 있는 선우라고 합니다. 우리 절 조실이신 청문 큰스님에서 마중을 보내셔서 이렇게 나왔습니다."
사내는 눈만 꿈뻑꿈뻑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선우가 걸망을 달라고 하자 사내는 두 개의 커다란 걸망 가운데 하나를 선뜻 내주었다. 뭐가 들었는지 생각보다 묵직했다. 목수라면 아무래도 연장이 들어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손님은 어디서 오시는 뉘십니까?"
사내는 대답이 없었다.
"이 걸망 속에는 뭐가 들었길래 이리도 무겁습니까? 물론 연장들이겠지요?"
사내는 얼굴만 돌릴 뿐이었다.
"내소사는 처음이십니까?"
싱긋이 웃을 뿐이었다. 선우화상은 끈질기게 물었다. 청문대사도 결국 무릎을 꿇린 그의 고집이었다.
"큰스님과는 잘 아는 사이십니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일주문에서 법당 앞까지 도며 선우화상은 연신 질문을 퍼부었고, 그는 여전히 말 한마디 없었다. 은근히 약을 올리고 벙어리에 귀머거리가 아니냐고까지 자존심을 건드렸지만 사내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선우가 약을 올리고 질문을 할 때마다 그가 표정을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귀머거리는 아닌 게 분명했다.
나중에 선우화상은 자신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자신이 미워 미칠 지경이었다. 상대방은 일반인인데도 그처럼 대단한 인내력을 지니고 있는데, 자기는 소위 수도 하는 사람이면서 그렇게 채신머리없이 지껄여 댄 것이 미워 죽고 싶을 정도였다.
홀로 방에 들어와 생각에 잠긴 선우화상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제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승려이기 이전에 그도 사내였다. 더욱이 수행자임에랴. 사내대장부가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녀자만도 못한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냥 처음에 수인사 몇 마디로 끝냈어야 하는데… 나중에 그를 약올리고 욕하고 하는 짓은 하지 말았어야 옳은데. 허! 그것 참, 생각할수록 내 자신이 밉네.´
사내는 그날 하루를 쉬고 다음날부터 일을 시작했다. 대웅전 지을 나무를 베어왔다. 기둥과 서까래 대들보감을 구해 왔다. 나무 구입이 끝나자 그는 목침만한 크기로 나무를 잘랐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는 목침만을 잘랐다. 열흘이 가고 스무 날이 가고 한 달이 가도 그는 목침만을 잘랐다. 선우화상은 사내가 미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미쳤다고 했다. 하지만 청문대사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사내는 표정 하나 없었다.
그는 다섯 달 동안 목침을 잘라 댔다. 다섯 달이 지나자 그때에야 비로소 톱을 놓고 대패를 들었다. 목수는 끊임없이 대패질을 했다. 그는 삼매에 들어있는 수도승보다도 더 엄숙했다. 부처님이 삼매에 들어있는 수도승보다도 더 엄숙했다. 부처님이 삼매에 들어있는 보습이 바로 저목수와 같을 덕이라 여겨졌다.
그는 몸을 움직여 대패질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참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법당을 짓겠다는 생각도, 나무를 다듬는다는 생각조차 초월한 것 같았다.
물이 홈통을 흐르고 흘러 물레방아를 돌리는 것이라고 여겼다. 물은 물레방아를 돌린다는 생각도 자신이 흐르고 있다는 생각도 없이 물레방아를 돌리는 것처럼 목수도 그럴 것이라 선우화상은 생각했다.
목침을 다듬기 3년이었다. 선우화상은 참다못해 한 마디 했다.
"여보, 목수 양반! 목침 깎다가 세월만 다 가겠소. 법당은 언제 지으시려오?"
선우의 물음에도 목수는 빙그레 웃을 뿐 말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목침 다듬는 일에 열중했다.
선우화상은 자기가 한 말에 대답이 없자 공연히 자존심이 상했다. 목수를 골려 주고 싶었다.
그는 목침 한 개를 슬쩍 감추어 버렸다. 수천 개의 목침 가운데 한 개 정도 감춘다고 알 리 있겠느냐는 생각이었다.
엄청나게 깎은 목침을 다 세고 나서 목수는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일할 때와 달리 그의 얼굴에는 절망감이 깃들여 있었다. 연장을 다 챙기고 나서 땀을 닦은 목수는 청문대사를 찾아갔다.
"큰 스님! 아무래도 저는 법당을 지을 인연이 못 되는 것 같습니다."
그는 내소사에 온 지 3년이 넘어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선우화상은 그가 벙어리가 아니었음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그의 엄청난 인내력에 선우화상은 혀를 내둘렀다. 선우화상은 목수가 청문대사에게 한 말의 의도를 이미 알고 있었다.
청문대사가 물었다.
"왜, 무슨 일이 있소?"
"네, 목침 하나가 부족합니다. 아무래도 아직 저의 정성이 완전치 못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럼."
선우화상은 깜짝 놀랐다. 예상한 일이었지만 하나가 모자라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왜냐하면 수천 개의 목침 중에서 한 개가 없어진 것을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매일같이 목침을 점검했다면 또 모르되 목침을 자르기 시작하면서 다 다듬을 때까지 적어도 선우화상이 알고 있는 한, 한 번도 점검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 목침을 자신이 몰래 숨겼다고 토로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청문대사가 손을 들면서 말했다.
"가지 말고 법당을 그냥 짓도록 하시오. 목침이 한 개 모자라는 것은 그대의 잘못이 아니오."
선우화상은 뜨끔했다. 청문대사도 목수도 보통 인간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 -